산행기록

[전남 순천]호남정맥 빈계재~백이산(582m)~석거리재~주릿재3거리~국사봉3거리~桐巢山(464m)~한치재 다녀오기(2014/3/11/화 오후)

魚山/막걸리 2014. 3. 12. 14:37

산 행 지 : 전남 순천 백이산(582m), 보성 동소산(464m)

 

산행일자 : 2014년 3월 11일(화) 오후

 

누구랑 : 혼자

 

날씨 : 포근한 오후

 

산행 코스 : 호남정맥 빈계재(12:50)~△백이산(582m/13:25)~석거리재(14:04)~△485.5m(15:24)~

 

~빈계재3거리(15:39)~국사봉3거리(16:38)~△동소산(464m/17:30)~한치재(18:22)

 

산행 시간 : 12:50 ~ 18:22(5시간 32분)

 

 

지난 2월에 주릿재에서 동소산 갈림길에서 국사봉을 거쳐 망일봉을 가면서 동소산으로 시간을 낼려고 생각했다.

 

삐루님이 시간이 된다고 하고. 또 수요일부터 일기예보상으로 비가 예상되기에 나섰다.

 

동소산을 가기 위해서 호남정맥상의 빈계재로 갔다. 불재와 낙안읍성과 금전산을 지나.

 

어찌보면 빈계재~석거리재~주릿재3거리까지는 동소산을 가기 위해서 덤으로 지나게 되었다.

 

 

 

빈계재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포근한 날씨로 편안하게 시작했다.

 

백이산에 오르니 많은 산님들이 식사중이었다. 정상석과 이정표에도 따스함으로 옷을 벗어 걸어 놓고있었다.

 

이정표에 걸어 놓은 옷 때문에(?) - 확인하지 못한 내 실수지만은 - 백이산에서 좌틀해야하는데...

 

그만 직진으로 하산하였으니...

 

1시간여 알바를 감안하면 기실 11:50분에 출발했다. 총 산행시간은 6시간 반이었다

 

 

 

산행 후 동소산에 대한 내용을 찾다가 머슴의병장의 활약한 안규홍의병장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문병란시인의 <동소산의 머슴새>라는 시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덤으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일제에 대항했던 항일의병장은 나는 몇 분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오히려 친일했던 널리 알려진 인물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나 있지는 않을까?

 

 

 

한티재에서 삐루님을 만나 빈계재로 회귀했다.

 

귀가하면서 순천 연향동에서 청국장으로 저녁을 함께하고 헤어졌다. 물론 막걸리 1병을 하고....

 

자주 애용해주라는데도 불구하고 미안하고 고마울뿐이다.

 

 

 

 

<다녀온 개념도>

 

 

<들머리인 빈계재>

 

 

<낙안읍성 뒤에 있는 금전산(667m)>

 

 

<제석산(563m) 뒤로 보이는 여자만>

 

 

<낙안읍성 뒤로보이는 금전산~불재~오봉산(591m)>

 

 

<솟은 모후산(918m) 왼쪽으로 뿌옇게 보이는 무등산>

 

 

<호남정맥인 고동산~조계산능선>

 

 

<가야할 백이산>

 

 

<정상석과 삼각점>

 

 

<멀리 보이는 존제산>

 

저수지 위로 주릿재로 오르는 도로가 보인다

 

 

<낙안읍성과 금전산>

 

 

<백이산 정상 #1>

 

 

<백이산 정상 #2>

 

 

<지나온 백이산능선>

 

 

<석거리재 #1>

 

 

<석거리재 #2>

 

 

<석거리재 #3>

 

 

<되돌아본 백이산>

 

 

<금전산과 오른쪽 백이산>

 

 

<임도>

 

 

<485.5.m 삼각점>

 

 

 

 

 

<도로와 만나고>

 

 

<주릿재3거리>

 

 

<호남정맥 고동산~조계산능선>

 

맨 오른쪽은 솟은 금전산

 

 

<호남정맥 조계산능선>

 

 

<국사봉3거리>

 

국사봉으로 가는 길은 윗쪽으로

 

 

<당겨본 모후산>

 

 

<당겨본 망일봉>

 

 

<호남정맥 존제산능선>

 

 

<잡목 들 뒤로보이는 국사봉>

 

 

<모후산>

 

 

<맨 왼쪽 뒤 흐릿한 무등산 오른쪽 모후산>

 

동소산 정상에서 조망은 너무 좋았다

 

 

<동소산 정산>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멀리 모후산과 무등산이 보이는 조망은 참으로 멋있었다.

 

동소산이 특별한 것은 문병란시인이 "동소산의 머슴새"한 시집을 내었다는 것이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1879년 낙후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나 항일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안규홍의 일대기를 작품화한 서사시로,

 

민족의 제단에 서슴없이 몸을 던졌던 그의 일생을 민중사의 새로운 한 면으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언제 한 번 읽어 봐야겠다.

 

 

 

<문병란시인 소개>

 

1935년 전남 화순 생, 조선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 졸업, 조선대학교 인문대 교수, 재단이사 역임,

 

1959~63년 현대문학지에 김현승시인의 추천을 받아 '가로수', '밤의 호흡', '꽃밭' 으로 등단. '정당성', '죽순 밭에서', '땅의 연가',

 

'매화연풍', '동소산 머슴새' 등 26권 시집 간행. '저 미치게 푸른 하늘', '영원한 인간상' 등 다수의 산문집 간행.

 

수상으로는 제1회 박인환 시문학상 수상,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광주예술상 등 다수의 문학상이있으며,

 

직녀에게, 호수, 빛고을 아리랑, 빛고을 진혼곡, 광주찬가 등 작곡되어 애창되기도 했다.

 

현재 무등산 밑 지산동 122-2번지에 서은문학연구소개원, 대구의 낙동강 문학, 부산의 문예대학, 문예시대와 교류하고

 

시문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이정표>

 

동소산과 한말 의병장 안규홍(1879~1911)

 

본관은 죽산(竹山).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어린시절에 머슴살이(담살이)로 홀어머니를 모셨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뒤 일제가 대규모 병력을 이용해 의병들에 대한 살육작전을 벌임에 따라 의병투쟁의 양상도 유격투쟁으로

 

바뀌고 평민의병장의 등장이 보편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여 처음에는 유지들에게 도움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함경도 출신으로 순천 부근에서 활동하던 강성인(姜性仁) 부대에 투신하여 부장(副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강성인이 양민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하자 1908년 그를 군율대로 총살하여 군기를 확립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부대에는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지역의 시장을 돌면서 인원을 보강했고, 그 과정에서 병법에 밝은 오주일(吳周一)이 합세했다.

 

보성 동소산(桐巢山)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1908년 일본군이 '보성폭도토벌대'를 구성하여 보성·벌교·순천 등지에 포진하여 의병대를 공격하자,

 

매복하고 있다가 보성헌병분견소의 헌병을 기습하여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뒤 대원산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6월 보성군 내에 있으면서 부하를 시켜서 일본군이나 일본군 통역관을 살해하기도 하고,

 

헌병·경찰 연합토벌대가 습격해오자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8월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삼아 병력을 증강하고 진산(眞山)에 집결했다.

 

이때 헌병분견대 병력이 인근 수비대 경찰과 연합토벌대를 만들어 포위해오자, 의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직접 천보총(千步銃)으로 적의 선봉을 쓰러뜨렸다. 이에 의병들이 용기를 내어 전투에서 승리했다.

 

1909년 1월중에 밀정이 있어 아군의 정보가 새나갔지만 이를 모른 체하고 적의 행군요소에 복병하고 대기하다가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적을 무찔렀다. 3월에는 원봉에 주둔하던 적을 기습했다.

 

이때 와타나베 부대[渡邊部隊]와 2개월에 걸쳐 10여 차례 접전했으며, 와타나베가 한국인 첩자를 보냈으나 이를 역이용하여

 

와타나베를 처형했다. 보성전투에서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유격장 안택환(安宅煥)과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여

 

장흥 전세가 불리해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했다. 이때 부하들이 대거 일본군에 투항함에 따라 7월에 부대를 해산했다.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밀고하여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 부대[富石部隊]에

 

붙잡혔다. 그뒤 광주에 수감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진 뒤 1911년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다음 백과사전>

 

 

<동소산 정상 3거리>

 

 

<이정표>

 

한치재~주릿재가 11.3km

 

 

<이정표>

 

등로정비가 잘 되어 있어 편했다

 

 

<낙조 #1>

 

 

<낙조 #2>

 

 

<한치재 #1>

 

 

<한치재 #2>

 

 

<한치재 이정표>

 

선량산이 있는가 보다

 

 

<돌탑 #1>

 

 

<돌탑의 유래>

 

가을에 밤이 많아서 율어인가?

 

 

<한치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