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록

[전남 담양]가사문학관 주차장~식영정~장원봉(342m)~호남정맥 능선~최고봉(493m)~까치봉 갈림길(466m)~까치봉(424m)~소쇄원~주차장 회귀하기(2013/9/1

魚山/막걸리 2013. 9. 2. 15:39

산 행 지  : 장원봉 (342m), 호남정맥 최고봉(493m), 삿갓봉(466m) 그리고 까치봉(424m) 

산행일자 : 2013년 9월 1일(일) 오후 

누구랑 : 마눌님과 막걸리

날씨 :  더운 오후 

산행코스 : 한국가사문학관 주차장(12:43)~식영정(12:47)~△장원봉(342m/13:31)~호남정맥 능선(14:15)~

               ~△최고봉(493m/14:30)~까치봉 갈림길(466m/14:43)~△까치봉(424m/15:23)~소쇄원(16:01)~

               ~가사문학관 주차장(16:38)   

산행시간 : 12:43~16:38(3시간 55분)

 

가사문학관이 있고 식영정과 소쇄원이 있는 뒷산들을 회귀하자고 마눌님을 설득시켰다.

등산길도 물론 아주 좋다고 얘기를 하여...

또 식영정과 소쇄원도 한 번 쯤 다시 다녀오자고 하여 OK..!

 

오랫만에 광주호도 가까이서 보고

또 식영정과 소쇄원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림자도 쉬고 싶다는 식영정 너머로 보이는 무등산 전경이 한 폭의 그림같았다.

 

하산길에 들린 소쇄원에는 관람객이 많았다.

제월당에 걸려있는 현판을 설명해주시는 분이 계셔 나도 한 참을 거기에서 들었다.

언제나 했던 생각이지만

옛 정자에 걸려있는 편액에 쓰여진 글귀는 전혀 해독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라 항상 아쉬움을 느꼈는데..

이렇게 설명해주시는 문화유산 해설 선생님이 계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가사문학관을 포함한 정자들도 구경하고 산행도 즐길 수 있는 이번 코스를 권하고 싶다. 

 

<다녀온 개념도-산여울님 지도>

<한국가사문학관 주차장>

뒤로 보이는 능선이 오늘 가야할 등로다

<이정표>

식영정 뒤로 오른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식영정 설명글>

식영정사선.....석천 임역령,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1. 석천 임억령>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수(大樹)이며 호는 석천(石川),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해남출신이다. 

임수(秀)의 손자이자 임우형(遇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눌재 박상에게 글을 배웠고 1516년에 진사시, 1525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 설서 등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1552년 동부승지,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77년 62세에 담양부사가 되었다.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다. 

성산(식영정)시단을 열어서 김성원, 정철, 고경명 등의 제자들과 수창했는데 

성산동 관련 한시문은 500여 편으로 그 작품성이 뛰어난다. 
남면 지곡리 별뫼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 그의 사위인 서하당 김성원이 짓고 석천에게 증여한 정자로 

식영정이 있는 별뫼를 무대로 많은 작품을 남겨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 이라 

불리우고 있다.
작품으로 「면앙정삼십영」(1552년), 「식영정 20영」, 「서하당 8영」, 「식영정기」 등을 남겼다. 

고맹영과 김성원 등을 사위로 맞았다. 동복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 석천사, 창평 성산사(星山祠, 1795년, 정조 19년 건립)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 있다.

 

<2. 서하당 김성원 (棲霞堂 金成遠, 1525∼1597)>
자는 강숙(剛叔)이며 호는 서하당(棲霞堂) 또는 인재(忍齋)이다.
광주의 충효리(옛 석저촌)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아버지 김홍익(金弘翼)과 어머니 해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이다. 
6세가 되던 중종 26년(1531) 아버지를 여의었고, 인종 원년(1545) 서산유씨(瑞山柳氏, 柳泗의 딸)와 결혼하였다. 

장인인 유사와 하서 김인후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32세 때(명종 12년)는 당시 담양 부사로 있던 석천 임억령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하였다고 한다. 

33세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성산의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더욱 자연과 서적에 침잠하였으며, 여러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유하였다. 

김인후와 임억령을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고봉 기대승·제봉 고경명·송강 정철 등과 도의의 사귐을 두터이 하였는데, 

특히 임억령·고경명·정철과는 성산(星山)의 사선으로 만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한 여러 문인들의 시작 활동이 이어지게 되며, 「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의 가관(假官)이 되어 의병 활동에 나섰으며, 뒤이은 정유재란 때에 무등산을 거쳐 

동복의 모후산으로 피신하던 중 왜적에 의해 고령의 노모와 함께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를 남겼다.   


<3. 송강 정철 (松江 鄭澈, 1536∼159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함(季涵)이며,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중종 31년(1536) 서울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령부 판관 정유침이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이다.
맏누이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인 숙의로 입궐하고, 막내 누이가 왕의 종실인 계림군에게 출가 
하면서, 왕실과의 혼인으로 집안이 새로이 활기를 찾으며 펴 나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벼슬이 내려졌다.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왕자들과 어울려 놀며 친교를 쌓았으며, 

특히 훗날의 명종인 당시 경원대군과는 소꿉동무 사이로서, 정분이 매우 두터웠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사화에 연루되어 자형인 계림군이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맏형은 광양으로 유배되었으며,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했으며,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에서 풀러났다.
명종 2년(1547) 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가 집안에 휘몰아쳐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 와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도중 32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째형은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으로 은거하였으며, 송강은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명종 6년(1551) 아버지가 사면을 받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이후 27살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10년여 동안 이곳에서 송순·임억령·김윤제·김인후·양응정·기대승 등 당대 

기라성같은 학자·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으며, 김성원·고경명 등과 교우하며 성장하였다. 

명종 7년(1552) 김윤제의 주선으로 문화 유씨와 결혼하였으며, 신방은 현 창평면 해곡리 와송당(유종헌가옥)에 차렸다.
명종 16년(1561)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며, 이전에 우계 성혼, 율곡 이이 등과 교우관계에 있었으며, 명종 17년(1562) 

문과 별사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명종의 사촌형 경양군의 옥사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명종의 부탁을 거절함으로써, 수년 동안 좋은 벼슬길에서 소외되었다. 

이후 30살 때까지 형조·예조·공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공조·예조의 정랑에 제수되었다.
명종 21년(1566) 형조정랑,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로 임명되었으며, 북관어사로 나아가 함경도를 순시하였으며 

그후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홍문관에 들어갔다.
선조 즉위년(1567)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고 직후 율곡과 더불어 호당에 선출되었으며, 선조 2년(1569) 5월에 홍문관 수찬, 

교리, 지평에 제수되고, 교리,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570년 4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37살(1572) 되던 해 6월까지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살이 이후 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및 사인,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6년(1573) 홍문관 전한, 사헌부 집의, 군기시정 등을 역임하였으나 4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40살(1575) 되던 해 5월까지 약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살이 이후 내자시정, 사인으로부터 홍문과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자, 서인의 주요 인사로서 동인과 대립하다 

마침내 율곡에게 조정의 화합을 맡기고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였다(첫 번째 낙향).
선조 11년(1578)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고 

11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그 즈음에 벌어진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사건 옥사 처리 문제로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입고 직무가 바뀌고, 12월에 성균관 대사성·병조참지에 제수되지만, 이수의 옥사 이후 계속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12년(1579) 형조참의, 우부승지,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고,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치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두 번째 낙향).
선조 13년(1580) 1월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이 무렵 「관동별곡」·「훈민가」 등을 지었으며, 

관찰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도내 여러 폐단들을 시정·개혁하고, 영월 땅에 표석도 없이 버려진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며, 지방관을 독려하기 위해 「고을의 관리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글(諭邑宰文)」을 짓기도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강원도 내 민풍을 크게 진작시겼다.
관찰사의 외직에서 돌아와 참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정승 노수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신하의 상소에 임금이 내리는 답)을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합당치 않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과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세 번째 낙향). 

그러나 특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특히 도내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개혁하여 백성들에게 크게 칭송 받았으며, 그 무렵 전라도사로 있던 조헌과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된다.
선조 15년(1582)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정, 예문관 직제학,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선조 16년(1583)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지돈령 부사, 동지 성균관사에 이어 형조판서, 예조판서에 제수된다.
선조 17년(1584) 더 없는 지기였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고하며 애도의 시를 지었다. 

2월에 대사헌 겸 예문제학에 제수되며, 곧이어 찬집청 당상으로 차출되었으며, 8월에 지의금부사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임금이 총마를 특사하여 출입시에 타고 다니게 되니, 사람들이 그를 '총마어사'라고 불렀다. 

12월에 다시 특명으로 승진하여 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 겸 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선조 18년(1585) 판돈령으로 직무가 바뀌었으나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논핵을 입고 마침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 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가까이에서 계속 비방의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창평으로 낙향하였다(네 번째 낙향).

 이후 54살(1589) 되던 해 10월초까지 4년여 동안 향리 창평을 근거지로 초야에 묻혀 지냈으며, 이 기간에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선조 22년(1588) 맏아들 기명의 죽음으로 복을 입었으며, 정여립 모반사건이 적발되자, 아들의 장사를 위해 경기 고양에 올라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계를 올렸다. 

이어 기축옥사가 벌어지며,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되었다.
선조 23년(1590)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하면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7월에 수충익모 광국추충 분의협책 평난공신을 책하고 인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선조 24년(1591)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사직서를 올리자 체임되었다. 

 체임 : 벼슬 갈려 다른 벼슬 맡음.

윤 3월에 이르러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논핵을 입고 파직되었다. 

6월에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송강의 귀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천으로 정배되었다가, 곧이어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만에 북녘 당 강계로 유배되어, 거처 주위에 가시울타리까지 쳐지는 혹독한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이 기간 중 대부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선조 25년(1592) 4월 중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을 모시고, 

9월에 충청·호남 양호의 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선조 26년(1593)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고 북쪽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5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으며, 11월, 귀국 직후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할 뜻이 없는 것이 송강의 일행으로부터 나온 거짓 보고 때문이라는 엉뚱한 

무함을 입었다. 

이에 사면을 청하고 강화 송정촌으로 물러났으나, 당장 생계조차 꾸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깊은 시름을 안고 지내다가, 

마침내 12월 18일 강화 송정촌 거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뜬 이듬해인 1594년 2월에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장사하고, 1624년(인조 2)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665년(효종 6)에 

우암 송시열에 의해 충북 진천으로 이장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문청(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1691년(숙종 17)에 다시 관직이 삭탈 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재차 회복되었다.

 

<4. 제봉 고경명 (高敬命 ; 1533~1592)> 
조선 중기의 문인 ·의병장으로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霽峰) ·태헌(苔軒)이다.

그리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l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박광옥(朴光玉)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00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즉, 1592년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 금산(錦山)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로

(柳彭老)·안영(安瑛) 등과 순절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표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식영정 옆 소나무>

기품이 뿜어져 나온듯한 소나무다

<식영정에서 내려다 본 광주호>

<식영정>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丈人)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 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

『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이곳은 식영정 외에도 풍광이 수려하여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은데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堂),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으나

광주호가 생기면서 일부는 물에 잠기고 현재는 부용당만이 최근 새로 지었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가 건립되어 있다.<담양군청에서> 

<식영정 옆의 소나무 군락>

<식영정 아래 장서각과 부용정>

<소나무와 백일홍에 둘러싸인 식영정>

뒤로 보이는 무등산 전경

<식영정과 무등산>

<이정표>

<노송 사이로 보이는 광주호>

<성산별곡 시비>

 조선 시대, 송강() 정철() 지은 가사.

전라남도 담양군 있는 성산 풍경, 풍류객 김성() 세운 서하()과 식영정() 중심으로 계절 따라 변하 경치 읊고 김성원 풍류 예찬한 노래이다.

1560(명종 15) 지은 으로, 《송강가사()》 등에 실려 전한다.

<식영정 아래 부용정과 장서각>

<당겨 본 무등산>

<장원봉에서 본 광주호>

<장원봉 해맞이 데크>

날씨가 너무 청명하다!

<벽오동에 떠오르는 가을 달-석천 임억령>

<만수동 인가-송강 정철>

<소나무 길>

<이정표>

호남정맥과 만나고...

<위험한 돌길을 더위잡아 오르며-하서 김인후>

더위잡다 : (사람 무엇)높은 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끌어 잡다.

<호남정맥 상의 최고봉(493m)>

<호남정맥 길>

<까치봉 갈림길>

이곳에서 호남정맥과 헤어지고....

<까치봉 또는 삿갓봉>

<까치봉 삼각점>

<이정표>

<오곡문>

오곡문은 냇물이 담 아래로 흐르게 한 설치물로, 담 아래 터진 구멍으로 다섯 굽이를 이룬다는 뜻이다. 꽃담은 가르쳐준다.

사람을 위한 문이 아니라 물을 위한 문이라고.<전북일보에서>

<소쇄처사 양공지려>

송시열이 쓴 것으로 ‘소쇄옹 양산보의 조촐한 집’이라는 뜻으로

흰 바탕에 여덟 자의 검정 글씨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는

‘회사후소(繪事後素)’ 즉,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깔린 다음에 가능하다’는 공자의 말을 현실화한 징표다.<전북일보에서>

 

<소쇄공 양산보 (瀟灑公 梁山甫, 1503∼1557)>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瀟灑), 본관은 제주. 

창암(蒼巖) 양사원(梁泗源)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의 호가 창암이라 하여 소쇄원이 있는 마을을 창암촌이라 하였다.
어릴 때 정암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양산보가 15세 되던 해 서울의 조광조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그 문하에 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 같이 입학하여,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17세인 1519년에 시행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합격자의 수가 많고 나이가 어린 때문에 대신들이 관직을 주지 말 것을 요청하여 벼슬은 받지 못했다. 

이해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인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 향리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 숨어 살기를 결심하고 

창암촌의 산기슭 계곡에 소쇄원을 꾸미게 되었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라는 말은 원래 공덕장(孔德璋)이 쓴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상쾌하고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25세 때 부인 광산김씨와 사별한 이후 소쇄원을 지키다 1557년 3월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 자홍(子洪)은 일찍 죽고 2남 자징은 호가 고암인데 현감 벼슬을 하였고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다. 

뒤에 우암 송시열이 고암의 행장(行狀)을 썼으며, 「소쇄원도」에는 광풍각 옆에 고암정사가 건립되어 있다. 

3남인 자정(子渟)은 교도(敎導) 벼슬을 하였다.
양산보의 작품으로는 『효부(孝賻)』와 『애일가(愛日歌)』 등이 있다.<담양군청에서>

<제월당(霽月堂)>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월당 전면>

<소쇄원>

소쇄원의 ‘소쇄(瀟灑)’는 ‘빗소리 소(瀟)’ 또는 ‘물 맑고 깊을 소(瀟)`에 ‘물 뿌릴 쇄(灑)‘또는 ‘깨끗할 쇄(灑)’자이니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別墅:농장이나 한적하게 따로 지은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담양군청에서>

<광풍각(光風閣)>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대나무>

<소쇄원>

<소쇄원 입구>

<소쇄원 안내도>

<다녀온 가사문학 등산 안내도>

<이정표>

<다녀온 최고봉~까치봉 능선>

<버스정류장>

<가사문학관 뒤로 보이는 장원봉>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