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록

[광주광역시]광주여자대학교~ 동자봉(154m)~풍악정~어등산 석봉(338m)~외등마을~박산마을 다녀오기(2015/10/31/토 오후)

魚山/막걸리 2015. 10. 31. 21:05

산 행 지 : 어등산 동자봉(154m), 석봉(338m)

산행일자 : 2015년 10월 31일(토) 오후

누구랑 : 혼자

날씨 : 바람이 불어 쌀쌀한 가을 오후

산행코스 : 광주여대(12:50)~△동자봉(154m)~풍악정~△어등산 석봉(338m/15:03)~외등 갈림길~외등마을~

~벅산마을~시내버스정류장(16:00)

산행시간 : 12:50~16:00(3시간 10분)

새벽 2시반경부터 일어나 조카와 함께 일했다.

신문이 새벽 3시경에 배달되는 줄을 알았다.

아~~이렇게 빨리 아침을 여는구나!

 

마눌님이 부산으로 1막2일로 간다기에 비엔날레주차장으로 태워줬다.

덕분에 오랫만에 인태와 윤태를 보았다. 어째 좀 어색하다.

윤태는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험준비로 바쁘고, 인태는 오는 Off란다.

 

오전에 1시간을 자고나서야 오후 산행지를 찾았다.

어등산 기점으로 보이는 장성 불태산으 갈까하다가 그냥 어등산 자체로 정했다.

몸도 피곤했으니까?

 

외등마을로 하산하는 길이 아주 조용하고 편안했다.

박산마을을 지나오면서 송천 양응정선생에 대해서 배웠다.

그래.......가까운 지역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다음에는 무등산과 불태산을 가봐야겠다.

<다녀온 개념도>

<어등산 석봉에서 본 무등산>

<석봉 정상>

<외등마을로 하산>

<용진산 석봉과 토봉>

<안내도>

<어등산 석봉능선>

<호송마을>

<박산마을>

<안내글>

<양씨삼강문>

광산구 박호동에 소재하는 양씨 삼강문(梁氏三綱門)은 1593년 6월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梁山璹)과 그 가족 6명 등

7인의 충 · 효 · 열 · 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려는 선비 홍탁의 상소로 1635년(인조 13)에 건립되었다.

원래는 양산숙을 비롯하여 효자 2인, 열녀 2인, 절부 2인 등 모두 7인을 모셨으나, 회진 임씨 문중으로 출가한 양산룡의 딸 제주 양씨는

임씨 문중에서 따로 정려를 모시고 있어 현재는 6인의 정려를 모시고 있다.
삼강문은 이들이 생전에 살았던 박뫼마을 앞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양씨 삼강문’ 현판은 1803년(순조 3) 이헌중이 썼다.

양산숙은 1561년 이곳 박뫼마을(박산)에서 문신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응정은 나이 38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양산숙은 그의 나이 16세에 아버지가 의주목사로 부임함에 따라 그곳으로 따라갔다.

그 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공부를 마친 뒤에는 반계(蟠溪)라는 곳에 정사(精舍)를 짓고 수양에 힘썼다.

양산숙은 동서 분당 시 서인(西人)으로 조헌과 함께 이이 · 성혼을 지지했으며, 동인(東人) 이산해 · 유성룡을 배격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의 나이 31세 되던 1592년에 일본군이 침공해 오자 양산숙은 고향인 박뫼마을(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로 와 형 양산룡, 동생

양산수와 함께 어머니 죽산 박씨 앞에서 저희 삼형제는 나라가 위태로운 이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씀

드렸다.

모친의 허락을 받은 후 양산숙은 나주에 있는 전 부사(府使) 김천일을 찾아갔다.

그의 집에는 송제민(宋齊民) · 이광주(李光宙) · 서연후(徐延厚) 등이 김천일의 거병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양산숙은 김천일을 의병장으로 하여 의병 모집을 하자고 제의했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찬동했다.

각각 흩어져 고을마다 격문(檄文)을 뿌리고 장정과 군량을 모으니 10여 일 만에 장정 수백 명과 많은 양의 군량을 모을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선 상주 북천전투(1592. 04. 25.)에서 이일(李鎰)이 이끄는 관군이 패하고, 사흘 후인 4월 28일의 충주 탄금대전투에서는

신립(申砬)이 지휘하는 관군마저 패하고 신립 본인은 전사했다.

신뢰했던 장수들이 연이어 패하자 선조 임금은 도읍 서울을 떠나 북쪽으로 파천 길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양산숙은 분개하여 모집한 의병을 근왕병(勤王兵)이라 칭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이 무렵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강(錦江)부근까지 진군했다가 서울이 이미 적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된 부대의 병사들은 뿔뿔이 헤어져 귀향했으며 일부는 의병군에 합세했다.

고경명도 두 아들과 함께 담양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7월 9일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 부자 등 수많은 의병이 순절했고 8월 18일의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는 호서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이 전멸당했다.

호남지역으로 밀고 내려오려는 일본군을 격퇴하며 그해 7월 경기도 수원 부근까지 올라간 김천일부대는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진을 치고

싸웠다.

그 후 강화도로 진영을 옮겨 주둔하던 김천일은 양산숙에게 의병활동과 일본군의 동향에 관해 보고하는 밀서를 써주고 임금이 있는 의주

행재소로 보냈다. 상인으로 변장하고 길을 떠난 양산숙과 곽현은 고생 끝에 행재소가 있는 의주에 도착했다.

양산숙은 선조 임금에게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전라병사 최원(崔遠)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경기도 수원 및 강화도 방면으로 진격했으며,

고경명과 조헌도 의병을 일으켰고, 경상도에서는 김호(金虎), 정인홍(鄭仁弘), 박성(朴惺),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고 있다고

보고했다.

임금은 김천일을 판결사(判決事)로 올려 창의사(倡義使)라 칭하게 하고, 고경명을 초토사(招討使)로 칭하게 했다.

이때 양산숙은 ‘흥부(興復)’라는 일종의 국토회복계획안을 올렸는데 임금은 이를 보고 즉석에서 그에게 공조좌랑(정5품)에 임명하고

교지를 내렸다. 양산숙이 다시 돌아와 그 같은 임금의 뜻과 소식을 전했다.

일본군은 1593년 4월 중순부터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빠져나간 적군은 경상도로 내려가 진주성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조정으로부터 적을 추격해도 좋다는 명이 내리자 김천일은 진주성에 입성했다.

최경회 · 고종후 · 심우신 · 장윤 · 강희보 · 황진 등이 모여들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대구, 상주, 남원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김천일로부터 병력 지원 요청서를 받아든 양산숙은 6월 20일 대구에 있는 명나라군 총병(總兵, 사령관)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했다.

양산숙이 돌아온 다음날부터 전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원군이 없는 상황에서 성곽 안의 병사들은 결사 항전을 외치며 성을 포위한 일본의 10만 대군과 9일 동안 격전을 치렀다.

명나라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는 단 한 사람의 병력도 지원하지 않았다.

6월 29일 장대 빗속에 동문의 석벽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물밀듯이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

최경회 · 김천일 등 장수들은 남쪽 촉석루로 몰렸고 마지막 순간에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을 품에 안고 남강 물에 뛰어들었다.

그에 앞서 김천일은 양산숙에게 일단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거사를 도모하여 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으나 양산숙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은

후 김천일, 최경회 등과 같이 물속에 뛰어들어 그의 나이 32세에 순절했다.

뒤에 나라에서 양산숙에게 좌승지의 직위를 내리고 정려를 명했다.

효자로 모셔진 양산룡(梁山龍)과 양산수(梁山岫)는 양산숙의 형제들이다.

양산숙이 김천일을 도와 의병에 가담하여 강화도(江華島)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 지방에서 재물과 곡식을 모아 1만여 명의 병사가

먹을 수 있는 군량을 조달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들은 정유재란 때는 일본군이 접근해오자 가족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나주 삼양포(三洋浦)에서 뱃길로 떠나려고 했는데

삼양포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순절했다.

양산숙의 어머니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일본군과 조우한 후 도망가다가 바다에 투신했으며, 그의 부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자결했다.

김광운에게 출가한 누이 제주 양씨(濟州梁氏) 역시 일본군을 만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양산숙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바닷물에 몸을 던져 지조와 정조를 지켰다.

양씨 삼강문은 1985년 2월 25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박뫼마을>

<버스정류장>

<버스 종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