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록
[전남 보성]대원사3거리~까치봉(578m)~말봉산(584m)~천봉산(608m)~대원사3거리 회귀하기(2018/5/25/금)
魚山/막걸리
2018. 6. 3. 06:58
◈산 행 지 : 전남 보성 까치봉(578m), 말봉산(584m), 천봉산(608m),
◈산행일자 : 2018년 5월 25일(금)
◈누구랑 : 막걸리
◈날씨 : 따뜻한 날
◈산행 코스 : 대원사3거리 주차장(13:35)~△까치봉(578m/15:26)~△말봉산(508m/16:10)~△천봉산(608m/16:36)~
~죽산교~대원사3거리 주차장(18:45)
◈산행 시간 : 13:35~18:45(5시간 10분)
오랫만에 보성 천봉산을 찾았다. 한 2년만이다.
오르는 길에 조망도 거의 없는 그런 산길이다. 모후산이 겨우 보일 듯하다가 없어지고
구경을 하기보다는 생각하면서 숲 길을 걷는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천봉산에서 쉬면서 막걸리2병을 먹으니 기분이 아주 업된다.
하산하면서 조심조심 내려왔다.
문덕교로 하산하였다.
다음에는 이런 코스를 역으로 한 번 해야겠다.

<다녀온 개념도-1>

<다녀온 개념도-2>

<들머리인 대원사3거리 주차장>

<이정표>

<모후산 위용>

<까치봉 이정목>

<숲 길>
노각ㄴ무가 많이 있었다.

<이정표>

<말봉산>

<천봉산 정상>

<천봉산에서 본 모후산>

<삼각점>

<숲 길>

<주암호>

<임도>

<숲 길>

<문덕교>

<죽산교>

<주암호 상류>

<주암호 상류>

<이정표>

<산앙정 입구>

<죽산교>

<표지석>

<대원사길>

<이정표 안내글>
| 南道 정자기행(130)-절경에 정자가 없으면...보성 산앙정(山仰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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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녹음이 그리운 달이다. 거기에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면 어디든 사람이 즐겨 찾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 유서 깊은 옛정자라도 자리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해야 할 것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순천시, 화순군에 걸쳐 만들어진 주암호 다리를 건너 대원사라 표지판 옆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왕벗나무 터널'이란 문구도 볼 수 있다.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감각동 마을에 6km에 이르는 왕버들 터널을 지나다 보며 대원사 입구에 다다르면 바로 왼편 천봉산 계곡에 죽천 (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 중종 21∼1597 선조 30)의 정신을 기리는 정자, 고적한 산앙정(山仰亭)을 만나는 행운을 맞게 된다. 이 길에 벚꽃이 필 때면 교통체증은 각오해야 한다.
이 정자는 길에서 계곡을 건너야 하는 반대편에 수풀로 포위되어 아늑한 곳에 자리했다. 지붕에 수풀이 무성히 자란 것으로 보면 이곳이 습한지역을 반증하고 있었다. 정자 내부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무더운 날씨인 오후 2시각인데도 정자에 머무는 동안 추운 기운을 느끼게 했다. 바위를 차고 내려 오는 계곡 물소리에 조용 할 수는 없지만 그 소리는 청아하게 들린다. 이곳은 소나무, 개울물을 보면서 느낀 자연예찬을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이다. 고상한 감성으로 그려낸 한 폭의 동양화 속에 주인공인 듯하다.
근경에 맑은 바람에 일렁이는 소나무숲이 있고, 원경으로 내려다보면, 골짜기에는 산안개가 가득피어 오르고 잔잔한 물소리만 천아하게 들려와 다시 시각에서 청각으로 시적화자의 관심은 옮겨진다.
밤중에 산길을 걸을 때 들리는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옥구슬 흐르는 소리와 같다고 말한다.즉 시각과 청각을 동원해서 자연이 주는 경이로운 풍경과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울림을 잘 그려내고 있다.
산앙정(山仰亭)은 대원사 남쪽 우계상, 즉 문덕면 죽산리에 죽천의 후손 창주(彰柱)가 건립했다. 정자내부에 걸린 산앙정기에 의하면 기사년(1929년)에 죽천 박광전의 사상을 받드는 보성의 재야지식인들이었던 한말의 도학자 회봉(晦峰) 안규용(安圭容, 1873~1959),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1874 ~ 1965), 낙천(樂川) 이교천(李敎川 1882 고종19~1931) 등이 중수하는데 동참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문신.서화가요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른 해관 윤용구(海觀 尹用求 1853년 철종 4∼1939년)가 썼던 것으로 보아 정자 건립의 시대적으로 일치한 것은 물론 정자의 격조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순천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전남도내 정자 현판 등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조선 중기 학자로 동복(同福)의 사평촌(沙坪村)에 임대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서예에 열중한 고반(考槃) 남언기(宜峯 南彦紀 1534(중종 29)∼? )가 계곡에 있는 구암(龜巖)에 써서 판각한 '우계(遇溪 )'란 현판도 걸려 있다.
이 곳을 우계(遇溪)라고 한 것은 사람이 시내를 만나고(人遇溪), 시내가 사람을 만난다(溪遇人)는 선비다운 의미도 이 계곡과 정자에 담았다. 천봉산 계곡에 죽천 선생의 나이 32세 때 죽천(竹川)가에 우계정(遇溪亭)을 짓고 안방준과 난고반의 교유처로 삼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으며 그 선비정신과 의로움이 수 백년을 두고 내려온다.
그래서 정명 산앙(山仰)은 ‘고산앙지(高山仰止)’의 줄임말로 시경 거할(車舝)편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가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로 즉 존경할 만한 선현(先賢)을 사모할 때 쓰는 표현으로 그들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해마다 향리에 선비들이 여기 와서 계곡에서 놀면서 계를 치르며 논의하고 즐기며 후세에 이 자연과의 만남을 알리기 위해 거북바위 위에 글을 새기기도 했다. 이곳에서 술이 빠질 수 없는 일, 그리고 술에 취해 목소리에서는 시가 흐르는 것은 당연한 연상으로 이어진다고 뭐라 하느 이 없을 것이다.
 | | 박광전은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호남의 명유(名儒)를 논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첫째로 삼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일재(一齋, 김감(金勘)ㆍ미암(眉巖( 유희춘 다음으로 삼았다
산앙정을 핑게 삼아 박광전의 인물을 알아 본다면 뜻 있는 시간은 아닐까? 분위기에서 기대승의 '지팡이 짚고 한가로이'란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고목에는 오열하듯 매미가 울고, 소나무 밑엔 졸졸 물이 흐르네 어떤 사람 홀로 뜰에 서서. 지팡이 짚고 한가로이 구름을 바라보네' 老樹疎蟬咽咽 松根流水涓涓 有人獨立階上 倚杖閑望雲邊
그는 호 죽천(竹川), 이름은 박광전(朴光前 1526 중종21~1597 선조30)이다. 그는 중종 21년(1526) 조성면 용전리에서 태어났으며, 이퇴계의 문인으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대 유학자로서 광해군의 사부를 지냈다.
박순, 기대승, 양자징 등과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수업을 끝내고 돌아갈 때 이황은 주자서절요 1질과 시 5편을 주며 이단의 학문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후 주자서절요 를 연구하고 이황과 질의한 내용을 1권으로 묶어 내어 많은 문사들이 베껴 유포시켰다.
그는 156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유희춘(柳希春)이 감사(監司)였을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고, 1581년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다시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함열현감, 회덕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나 상관의 뜻을 거슬려 파직되어 1589년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도 적극적이었던 인물이었다. 15세기의 초기 사림(士林)과 기묘사림이 소학(小學)]의 학습과 실천을 강조하면서 내세운 공부 태도를 가리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했다또 다시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判官)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칠순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벽전투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노병으로 인해 군영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승지에 증직되었다
이때에도 전란극복을 위해 백성들을 위무하고 유민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우국충정을 몸소 실천한 남도 의리의 인물로 꼽힌다.
사후에도 평소 그의 학덕과 충의를 흠모했던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숙종 33년(1707)에 용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천강원액(天降院額) : 1707년(숙종33년) 용산서원(龍山書院)의 액호를 하사받았다.
그의 문인으로는 안방준(安邦俊)과 선인후(宣仁厚) ․ 선정달(宣廷達) ․ 안중묵(安重黙) ․ 권극제(權克悌) ․ 정길(鄭佶) ․ 김성장(金成章) ․ 이윤남(李允男) ․ 박광선(朴光先) ․ 정사제(鄭思悌) 등이 있다.
정구, 김성일,유성룡과 함께 이황의 학풍을 이은 네 제자 중에 한 명이었던 안방준은 "호남에서 조선조에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김인후, 기대승, 이항, 유희춘 그리고 나의 스승(박광전)이 있을 뿐이다"고 평가했다.
이 밖에 겸백 사곡리 양지마을에 사당 화산재(華山齋), 노동면 광곡리 광탄 광곡역 위 죽천정(竹川亭), 미력면 덕림리 우와실에 ‘용산서원유허비’ 등에 유적 있다.
보성의 인물로 학자요 시인이었던 '자연인으로 '귀거래사' 같은 삶을 살면서 담은시집 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산앙정을 수축한 안규용,송운회, 이교천과 교유했던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 1877 ~1945)이 박죽천을 기리며 읊은 시가 전하고 있다.
천봉산은 높고 물 절로 흐르고 /선생은 모습은 천추에 남는다. 하늘이 내림 원액 그 글 중하고 /귀신이 보호하는 바위 글 고적으로 남는다. 天鳳山高水自流 先生風義想千秋 天降院額斯文重 鬼護巖銘古蹟留
달빛 아래 다듬이 소리에 마을이 가깝고 구름 속 종소리에 절문이 그윽타. 해마다 향리 선비들 시를 짓고/녹음방초 좋아해 함께 노닌다. 月下砧鳴村戶近 雲中鍾落寺門幽 年年鄕士來修禊 偏愛芳陰伴憂遊
우리가 옛 정자를 찾는 이유는 도심에서 흔히 보는 콘크리트 건축이 아닌 유선이 날렵한 멋스러운 목조건물을 볼 수 있음이요, 그들이 지어 낸 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옛 문학의 단면을 느낄 수 있다.
우리네 선보등의 유수의 문화, 서구의 정복과 억지문화로 다 사라져 간다. 조병진(曺秉鎭)은 이미 이를 개탄했었다.
산 아이 내게 와서 들이 아름답다 하니/쉬는 날 향기 찾아 거리를 걸어본다. 서리가 마른 뒤 늙은 나무는 꽃과 같고 /눈 쓸어간 벼랑에 새 부들 잎 먼저 난다. 山童告我野容佳 暇日尋芳試步街 老樹猶花霜盡後 新蒲先葉雪消涯
때가 오매 만물은 이치 따라 돌아드는데 /나이 든 사람은 탄식과 회한뿐이라. 지금 풍욕하는 벗이 매우 드무니/저무는 봄 이 즐거움 누구와 함께 할까? 時來物有還生理 年老人多減嘆懷 今世最稀風浴伴 暮春樂意與誰同
북송 대의 유학자인 정이(程頤)는 위기(爲己)란 자아의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고, 위인(爲人)이란 남들로부터의 인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했으나, 결국은 세상을 개선하는 일에 이바지했다고 이르고 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성의 임계영(任啓英)· 능성의 김익복(金益福)· 처남 매부지간에 장흥의 문위세(文緯世) 등과 격문을 띄우고 문인들과 더불어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從事)로 삼고 의병을 모집해 '전라 좌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역활을 하며 1593년 익위사 익위에 임명되었다.또 무용지용(無用之用)이 대용(大用)이라 했다. 세상에 무용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가장 큰 쓰임이 있음을 뜻한다.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상수리나무(櫟)와 가죽나무(樗)는 쓸모가 없다 하여 세상에서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자에서 머문 이들의 인물이나 사연을 생각할 수 있어서도 좋고 기찬 서예에 조각품까지 볼 수 있는 예술적 종합 까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자연조화적 풍경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먼거리를 마다하고 그곳에 간다. 참고문헌=조선왕조실록사전. 담은유고. 설주유고집 문화.김은희/ nox9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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